남근숭배사상이 여성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여러 사례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러한 관점에서 벗어나 인류가 무자비한 자연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가 관건이다. 신비한 생명력의 근원을 남성 성기에서 찾았고, 그것을 숭배함으로 생존과 풍요를 바랐던 신앙의 관점에서 볼 것이다.
각 문화권의 남근 사상
전 세계 고대 문화권 유적에는 공통점이 많다. 그중 하나가 남근 숭배 사상이다. 목재나 암석에 남자의 생식기를 조각하여 세우거나 비슷한 형태의 자연암석을 대상으로 하여 풍년, 풍어, 자손만복 등을 기원하고, 질병이나 악신으로부터 자신과 마을을 지켜주기를 기도했다. 남근숭배 신앙은 인류의 선사시대부터 남자의 성기가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신비한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원초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아부시르에 위치한 제 5왕조 ( BC 2494~2345)의 태양 신전 마당에 세워진 사각뿔탑을 기원으로 하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거대한 석재기둥은 위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는데 피라미드 형상을 의미하여 태양신 '라'를 상징한다. 그리고 곧게 솟은 거대한 형태는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의 남근을 상징하는 요소로 쓰였다.
2016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몽골 북부의 항가이 산맥에 위치한 톨보르-21 유적지에서 남자의 성기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했다. 길이 1.7인치의 이 물체는 페니스 펜던트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드러났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약 4만 20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세계 곳곳에서 그 유적은 수를 셀 수 없이 많다. 21세기에 이러한 민속신앙은 사라졌지만, 지역 풍습이나 축제로 놀거리와 축제로 남아있다. 현재도 일본에서는 해마다 남근축제가 벌어진다. 한국의 강릉지역에서는 정월 보름 10월 첫 5일에 남성의 상징물을 목각하여 마을 앞 나무에 매달은 새끼줄에 달아 놓고 제사를 지낸다.
한국의 남근 유적
<한국의 성신앙현지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남근 숭배 유적은 전국 120여 곳에서 확인된다. 청동기시대의 경상남도 울주 암각인물화, 신라 토우와 뱃사공토기의 남근, 안압지 출토 목제 남근 등 신라시대와 통일신라, 조선시대 순창의 남근석에 이르기까지 약 2000년의 역사에 걸쳐 있다.
충청남도 부여는 백제의 왕도인 사비성이 있던 곳이다. 사비성을 둘러싼 동쪽 성벽 바깥쪽에 능산리가 있는데, 여기서 여러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길쭉하게 깎아 그 면에 문자를 기록하여 장부, 책, 표찰, 짐 꼬리표로 사용되었다. 출토된 목간 중 295번은 일반적인 목간 형태와 달리 남근 형상이다. 거기에는 '하늘을 받들지 않겠다. 길을 지키는 신이 일어섰다' 라고 적혀 있는데, 당시 사비성에 변고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들은 변고의 원인이 사비성 바깥으로부터 왔다고 여겨 남성성의 상징인 남근 형상의 목간을 성 바깥에 두어 나쁜 기운이 사비성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하였다.
한국의 남근석의 명칭은 신체 성기의 발음을 그대로 차용하여 붙인 지지바위, 좆바위, 남근석이 있고, 은유적 표현으로 돛대바위, 삿갓바위로 불린다. 남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총각바위, 아들바위, 말바위, 장수바위 등으로 불렀다. 남근석의 위치는 대개 마을 입구나 마을 앞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마을 제사를 드렸고 부녀자들이 아들 출산을 바라는 기원의 대상처가 되기도 하였다. 또한 산기슭이나 산정상 등 후미진 곳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들도 역시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처가 되었다. 또한 이들 남근석은 마을의 성적 음란을 막고 청춘남녀의 순조로운 결합을 돕는다는 의미도 있었다.
남근석이나 남근 모형에 대한 신앙은 오랜 토속신앙으로 전해진다. 마을의 음기나 질병을 차단했으며, 이정표 역할까지 했다
또한 발굴된 무덤의 부장품으로 미루어 성기숭배사상의 또 다른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 성과 관련된 토우들은 성기를 노출한 남녀상, 성교합의 성애상, 남근을 곤두세워 여인의 음부에 맞대고 있는 형상, 몸의 전체 비례에서 남근이 과장되게 형용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이들 토우 모두가 무덤의 부장용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생산력에 근거한 성기숭배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저승세계에서의 부활과 자손들의 번창을 기원하는 간절한 소망을 담은 의례적 행위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조선시대 남근 사상
조선시대의 통치기제는 도덕적으로 엄격한 유교였다. 도덕적 질서를 중시한 까닭에 성윤리 또한 강한 제약 속에서 경직된 면을 보이지만, 오랜 역사를 지니고 전승되어 온 성과 관련된 민간신앙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졌다. 농경문화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직단에 사직신을 위한 국가연중제사 의례를 진행할 때, 신물로 목재남근을 깎아 붉은 칠을 하고 푸른 글씨를 써서 봉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남근 신앙은 민간에서뿐만 아니라 국가와 궁중에서도 신앙시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조선 양반출신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부군당에 목제남근을 걸어 두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한편, 불교에서도 종교적 관행으로 남근숭배사상을 배제하지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에 속리산 법주사에는 '송이 놀이'라고 하여 매년 설날에 신자들이 목재남근을 깎아 신당에 봉납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송이'는 남근을 이르는 불교적인 은어다.
성이 금기시되었던 조선사회에서도 남근숭배사상이 지속되었다는 것은 성에 어떤 의미를 두는가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응했음을 알 수 있다. '쾌락'으로 표상되는 성에는 사회적 제재가 강하게 가해졌지만 '생산과 풍요'라는 생산적인 측면에 국한되면 허용되었다. 조선 사회는 성의 표상을 고대사회와 달리 인위적으로 구분한 사회였지만, 선사시대 이래로 끈질긴 생명력의 표상은 연면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