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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밀교, 만다라, 합체불 신앙, 육자진언신앙

by 빛의 라 2024. 8. 25.

고려 시대는 지배층이 나라의 기틀을 잡고 질서를 세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불교는 개인의 수행보다 호국적 특성으로 의례가 많고 성대하였다. 또한 몽골로부터 전해진 다양한 불교문화로 밀교가 발달하였다. 이러한 밀교형식은 하층민의 생활에 어렵지 않게 스며들어, 불교는 지배층과 하층민 모두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밀교 형식에 대해 알아보자.

 

고려의 밀교

 

고려는 돈독한 불교적 신앙을 기반으로 건국되었고, 태조 왕건 이래 공양왕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열기는 계속되었다. 태조 왕건은 29명의 호족의 딸과 결혼을 통해 화합과 회유 정책을 표방했는데 당대 실효를 거두어 정치와 군사제도가 정비되어 갔다. 하지만 태조 사후, 정치적 안정은 견고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개국공신들과 그 후손들에 대한 대우 문제, 왕의 외척들의 득세, 지리도참파의 반란, 거란의 침략과 금나라의 위협, 무신정권의 등장, 몽골의 침략과 간섭, 삼별초의 난 등 건국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고려 사회는 국내외적  불안 요소가 많았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문벌귀족 세력들은 정치와 경제제도의 정비만으로 사회의 안정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만민의 화합과 그 구심점의 회복은 통치력만으로 이루어낼 수 없어 강력한 종교를 찾았고 불교에 의지하여 사회의 회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고려의 불교계는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서 호국적 특성을 중시하는 양상으로 발달해 나갔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서는 밀교 의식에 기반한 도량(절이나 사찰) 개설이 필요해졌다. 그 이유는 불교의 경전과 의궤 중, 국가 안녕과 외적 퇴치에 관한 구체적인 기도법은 바로 밀교의 교설에만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수많은 밀교 방식의 불교의식들이 집행되었다. 밀교기도도량(절이나 사찰)의 개설과  왕실의 왕위계승의식에까지 밀교 의식이 수용되었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송나라 불교의 영향이 약화된 반면 몽골로부터 다양한 불교문화가 유입되면서 불교문화가 더욱 풍요로워졌다. 특히 밀교와 관련된 만다라의 수용, 합체불의 신앙화, 진언독송문화의 수용 등은 한반도 밀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만다라 신앙

'만다라' 낱말 자체는 '원'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만달라'를 음역 한 것이다. '만달라'는 본질을 뜻하는 '만달'과 소유를 뜻하는 '라'가 결합되어 이루어진 낱말로 본질의 것 혹은 본질을 소유하거나 본질을 담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만다라는 원래 힌두교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불교에서도 사용된다. '만다라'는 종교의식을 수행할 때, 보조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정해진 양식이나 규범에 따라 그려진 도형을 가리킨다. 기본 형태는 사각형의 중심에 원이 있으며 사각형의 각 변의 중앙에 한 개의 문이 있는 형태로, 이때 각 문은 주로 영어의 티(T) 자 모양을 한다. 

 

불교의 밀교에서는 다라니(불교 경전을 해석하지 않고 음대로 암송하는 것)를 암송하는 것을 통해 마음을 통일시키는 수행과 여러 부처에 대한 공양(염불)이 강조되었다. 우리나라 만다라 신앙의 중요한 단서로 들 수 있는 자료는 15세기 중반에 봉안된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사리 복장유물 중에서 발견되었다. 발원문에는 '원나라 세조 29년'이라는 문구가 있어 이 만다라가 고려시대의 도판을 재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 세조 어의에 고려시대에 쓰였던 만다라 그림이 사용되었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씨 집안에서 대대로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인다.

일반적으로는 불교신자가 만다라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드물다. 만다라를 부처와 보살의 세계를 구현하는 과정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만다라를 조성하고, 그것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신앙이 있었다. 

 

합체불 신앙

 

전라남도 화순에 위치하고 있는 운주사는 고려시대 말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내에는 사각형의 탑과 원반형의 탑 사이에 석조건축물이 있다. 그 석조물 안에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과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이 등을 맞댄 합체불의 형태로 모셔져 있다. 부처와 부처가 하나로 합체를 이룬 형태의 불상은 세계적으로 희귀하다. 티베트 불교의 경우는 석가모니와 보살의 합체상은 있어도 비로자나불과 석가모니불이 동체를 이룬 형상은 발견할 수 없다. 이 합체물 각각의 정면에는 비로자나불의 앞에 원반형의 탑, 석가모니불의 앞에는 사각형의 탑이 서 있다. 

 

이와 같은 사원구조는 불교의 융화와 법신과 화신의 합체를 통한 생산, 새 시대의 도래를 기원하기 위한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남쪽을 향해서 항마촉지인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은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왜구의 퇴치, 남쪽지방의 평정을 위한 바람을 담고 있다. 북쪽을 향하여 지권인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것은 지혜의 광명으로 국가의 미래를 밝히고 안위를 기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불안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온 백성들이 화합을 이루고, 전국토를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던 창건자의 기원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육자진언신앙

 

육자진언신앙 중에서도 여섯 자의 진언 한 자 한 자에 금강계 만다라의 의미를 부여한 것을 '금강계 육자진언신앙'이라고 한다. '옴마니반메훔'은  산스크리트어로 그 뜻은 '온 우주에 충만하여 있는 지혜와 자비가 지상의 모든 존재에게 그대로 실현될지어다'라는 뜻이다. 아시아 전역에서 암송되었고 특히 티베트 승려들이 매일 반복하는 진언으로 자리 잡았다. 고려시대뿐 아니라 현재에도 중요한 진언으로 여겨진다.

 

'옴마니반메훔'이 여섯 자를 외우면 그 발음만으로도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의해 번뇌와 죄악이 소멸되고 지혜와 공덕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나아가 '옴마니반메훔'을 염송 하면 과거 부처가 법계를 관조하고, 현세 부처가 중생을 이롭게 하며, 미래 부처가 일체중생의 이익을 돌보기 때문에 삼세천불의 상서로움이 온 세상에 깃든다고 한다. 또한  '옴마니반메훔'의 글자마다에는 지옥, 아귀, 축생, 인간, 아수라, 천상의 육도를 벗어나게 하는 힘이 있어 윤회로부터 해탈하게 하는 기본적인 주문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올바르게 발음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진언의 각 음절은 특정한 에너지와 진동을 지니고 있어, 정확한 발음으로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발음 자체가 명상과 치유의 도구로 작용하며, 불자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깨달음으로 잇는 길을 제공한다. '옴마니반메훔'은 불교의 핵심진언으로 현재까지도 그 유효함을 믿는 불자들이 많다.

 

결론

 

고려불교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로움을 더했다. 특히 밀교의 성행은 몽골로부터 전래된 다양한 불교문화와 호국 불교의 기도를 위해 구체적 기도법이 적힌 밀교 교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려사회는 사원경제가 크게 작용했다. 승려들은 국가로부터 노비와 토지를 급여받았고 면세와 면역의 특전까지 받았다. 게다가 백성들의 보시까지 더해 사원경제는 날로 풍요로워지고, 경제력이 커지자 대규모의 밀교기도도량들이 개설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고려시대의 밀교는 자연스럽게 국가와 민중들 속에 파고들며 생활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