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공감은 근육, 이론과 데이터 불일치, 망각이 낫다

by 빛의 라 2024. 3. 31.

이야기를 통한 타인에 대한 공감은 근육처럼 빈도에 따라 상승한다. 요즘은 이야기의 빅뱅시대다. 많은 이야기에 따라 많은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론은 틀린 것 같다. 세상은 여전히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론과 데이터의 불일치는 공감의 대상이 내집단으로 축소되기 때문이다. 외집단의 고통은 공감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스토리텔링의 문법에 따른 역사서사는 외집단에 대한 증오가 각인된다.  역사의 기억보다 망각이 낫다고 하는 이유다.

전쟁진행

공감은  근육

 

공감은 일종의 근육이어서 픽션을 소비하여 단련할수록 점점 튼튼해진다. 연구에 따르면 픽션을 소비하는 것과 공감 능력 검사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이야기에 공감도가 높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세계로, 다른 마음속으로 쉽게 이동한다는 의미다. 이야기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서로를 비타자화하는 데 일조한다. '그들'이 '우리'가 되는 경험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차이가 신기루임을, 우리의 편견이 사실무근임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톰 아저씨의 오두막> 같은 이야기는 백인 독자로 하여금 흑인에게 더 많은 공감을 느끼도록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실질적인 실천을 유도하였다. 또 다른 예를 보자.

1994년 6월 르완다 후투족이 투치족 이웃과 동료를 학살했다. 도구로 쓰인 것은 칼, 드라이버, 총기, 방망이 같은 원시적 무기가 대부분이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다른 점은 내 손에 피를 묻히는 물리적인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나치는 일반인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시스템에 의해 진행되었다. 후치족의 이런 식의 살인은 정말로 죽이고 싶어야 한다. 후투족 살인부대는 넉 달에 걸쳐 시간당 333명의 투치족을 살해했다. 80만 가량의 희생자가 6월 한 달간 목숨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두 부족 간의 미움과 증오는 극에 달했다.

10년 후, 르완다 현지 인력과 네덜란드 비영리단체는 치유 목적으로 <새 여명>이라는 드라마를 제작하였다. 화해라는 주제를 셰익스피어적 플롯으로 풀어냈다. 드라마가 끝나자, 열띤 논쟁이 오갔다. 이 드라마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드라마 덕분에 상대방 민족이 자신과 똑같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다. 청취자는 족외혼에 찬성하고 타민족을 신뢰하고 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차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데 동의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야기는 공감 기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 사상 지도자, 과학자들은 편견과 부족주의를 타파하고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이해를 하도록 이야기를 치켜세운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이야기가 있는 지금 우리의 공감은 늘어났는지 의심스럽다.

 

 

이론과 데이터 불일치

 

요즈음은 스토리텔링의 빅뱅이다. 그렇다면 공감의 빅뱅도 일어나야 하는데 이 이론과 데이터는 불일치를 보인다. 이유가 무엇일까? 괴물은 언제나 괴물처럼 행동하지만 착한 사람을 괴물처럼 행동하게 만들려면 우선 터무니없는 거짓말, 음험한 음모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정치적, 종교적 신화 같은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교회 안에서 자비를 애걸하는 투치족 수백 명을 도륙하는 것 같은 악행을 선행으로 둔갑시키는 마법적 허구를 그에게 들려주어야 한다. 후투족 우월주의 신화의 설계자들은 투치족을 유해 침입종으로 묘사했으며 당장 박멸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들고일어나 후투족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선동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이야기의 공감유발 능력을 찬미하면서도 이야기가 선인 못지않게 악인을 향해서도 스스로를 열심히 판촉 하는 용병이라는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한다. 후투족의 공감은 투치족의 고통에 대한 것이 아니라 후투족 내집단이 겪는 고통과 굴욕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공감은 편견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왜곡한다. 우리는 외집단보다는 내집단에 공감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 스토리텔링의 빅뱅은 실제로 내집단의 공감 빅뱅으로 이어졌다. 

프리츠 브라이트하우스트가 2019년 출간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에서 그는 '공감의 사디즘'을 언급했는데,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타적 처벌의 상황에서 느끼는 정서적이고 지적인 기쁨이다. 선인이 악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거나 능욕할 때 우리는 이런 기쁨을 느낀다.

 

 

망각이 낫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러나 기억보다 망각이 낫다. 왜냐하면 역사의 이야기꾼은 저 명제 덕분에 우리로 하여금 피비린내 나는 과거의 재앙을 반복하지 않도록 이야기를 매우 실감 나게 재연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임을 자부한다. 하지만 철학자 앨릭스 로젠버그는 역사 서사가 틀렸다고 말한다. 우리의 집단적인 역사 기록은 역사적 사실을 곧이곧대로 나열하는 학술적 서술이 아니다. 여느 스토리텔링 형식과 마찬가지로 가장 성공하는 역사, 우리의 사회적 기억 저장고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공간을 차지하는 역사는 과거의 무질서에 보편적 이야기 문법을 고스란히 적용하는 역사다. 그것은 착한 사람이 못된 사람과의 갈등에 휘말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역사다. 또한 여기에는 강한 판단이 결부된다. 이런 까닭에 로젠버그는 역사가 일종의 역사적 허구이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게 한다고 생각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유명한 문구 '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하고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가 참이라면 우리의 역사논쟁은 과거 시제 사실 못지않게 미래 시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인 셈이다. 서사적 역사는 무방비로 놓인 과거에 현재의 상상을 투영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즉 역사는 무질서한 과거를 편집하는데 그 목적은 현재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정돈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과거인의 자화상이라기보다 우리의 근심, 강박, 권력 투쟁을 그린 우리의 자화상이다. SF가 현재의 강박을 미래에 투사하는 장르라면, 역사는 현재의 강박을 과거에 투사하는 사변적 서사 장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