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불교는 삼국시대에 도입되었다.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토착신앙과의 갈등이 꽤 심했다. 결국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받아들여졌는데, 불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가 만족스러운 교리를 담은 까닭에 교세를 넓혀갔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신라 불교의 특징과 토속신앙과의 혼재 양상에 대해 알아보자.
불교, 무속과 갈등
인도의 불교는 중국에 들어와 '왕즉불(왕이 곧 부처다)'이라는 중국적 불교를 낳았고, 그것이 삼국시대에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의 불교 공인은 372년(소수림왕 2) 중국 전진의 승려 순도가 불상, 불경을 가지고 오면서 비롯되었다. 소수림왕은 초문사를 세워 그에게 이곳에서 불법을 전하도록 하였다.
백제는 384년 (침류왕 1) 중국의 동진에서 보낸 인도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공인할 수 있었다. 다음 해에 한산에 절을 세우고, 10명을 출가시켜 불법을 배우게 하였다. 고구려나 백제는 왕실에서 적극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점차 확고한 민간신앙으로 뿌리를 내렸다. 불교 수용에 별다른 저항이나 반발이 없었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에는 이차돈이라는 순교자가 나올 정도로 토착신앙과의 갈등이 심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불교를 반대하는 이유로서 '어린아이 같은 머리를 하고 이상한 복장을 하며, 예전부터 내려온 믿음과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불교의 전래과정에서 무속신앙이 불교를 압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설화가 5세기말 신라 소지왕 때의 '사금갑 설화'다. 까마귀, 말을 하는 쥐, 서출지(쥐가 나오는 연못)의 노인 등 무속을 상징하는 무리에 의해 왕실에서 향을 올리던 승려인 불교세력이 피해를 입는 내용이다. 고구려 승려 정방이 신라에 들어왔을 때, 신라 귀족들은 그를 괴상히 여겨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죽였다. 이처럼 샤머니즘적 원시 신앙이 불교수용에 장애가 되었다.
신라의 불교 공인은 527년 (법흥왕 14년)으로 삼국 중 가장 늦다. 이유는 신라의 지리적 조건과 관련이 깊다. 남쪽에 치우쳐 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중국 문화의 수용이 고구려와 백제보다 더디면서 토착신앙의 기반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왕 호칭에 무당이라는 뜻을 가진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명칭을 6세기까지 사용했다.
신라 불교는 민간층에 먼저 수용되고 왕실이 세력확장을 위해 정복이념으로 이용되면서 공인하고 장려되었다. 귀족들은 이차돈의 순교와 법흥왕의 강력한 왕권에 눌려 더 이상 반대할 수 없어, 불교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논리를 찾아야 했다. 전생에 선업을 닦아 이생에 귀족이 되었다는 윤회사상을 통해 백성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왕족, 귀족, 백성이 모두 부처의 제자라는 평등사상을 내세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위안을 찾았다.
호국불교와 미륵신앙
신라의 불교는 질병을 고친다든지 현세에 복을 기원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전반적으로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하였다. 불경 가운데 <인왕경><법화경><금광명경>은 호국적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은 백좌강화나 팔관회 같은 호국적인 불교 행사와 의례를 거행했다. 원래 팔관회는 <팔관재경>이라는 경전에 근거해 한 달에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 등 6일이라도 불교의 계율인 8계를 지키자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 그러나 진흥왕대 팔관회는 불교식의 의식이 아니라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위령제였다. 이러한 호국불교의 모습은 고려, 조선시대에도 팔만대장경의 조성이나 승려군의 조직 등으로 이어졌다.
미륵신앙은 신라불교의 토착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불이 제자인 미륵에게 장차 성불하여 제1인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삼아 이를 편찬한 <미륵삼부경>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이다. '미륵'은 원래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로부터 파생된 '마이트레야'로 '자비'의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이라고 부른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미륵불에 대한 신앙은 통속적인 예언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현현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시 신라인들은 미륵이 화랑으로 나타난다고 믿었다. 화랑은 6세기 중반부터 고대 신라에 있었던 소년들로 이우어진 심신 수련 및 교육 단체다. 주 목적이 심신 수련이지만 사실 관리와 군인 양성이었다. 화랑은 신라의 출중한 젊은이, 인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화랑 죽지랑의 탄생이 미륵신앙과 연결되어 있다. 불교가 이론적인 종교라고 비판받는 측면에서 미륵사상은 구체적인 신앙형태를 띤다. 따라서 미래의 미륵이 출현하여 이루게 될 유토피아적 이상 세계의 제시는 주로 하층민의 희망이 되었다.
불교와 무속의 혼재
고대 한국의 토속 신앙인 산신신앙은 불교전래 이전까지 토착민들에게 가장 강력했던 절대적 신앙이었다. 신라왕실은 32개 산에 사찰을 짓고 신들에게 제사를 지냄으로써 나라의 무사함과 번영을 기원했다.
그런데 불교가 도입되면서 두 종교는 대립하기도 하고 융합하기도 했다. <삼국유사> '원광서학조'에 나오는 원광법사(542~640)와 삼기산 산신에 관한 설화가 대표적이다. 내용은
'원광 법사가 삼기산에서 수행하고 있는데, 어떤 승려가 와서 암자를 짓고 시끄럽게 주술을 닦았다. 이에 산신이 원광법사에게 그 승려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게 하라고 했다. 그러나 승려는 마귀의 말이라며 무시하자, 이에 산신은 산을 무너뜨려 그를 죽였다. 산신의 위력을 알게 된 원광법사는 산신의 권유로 중국 유학길에 오른다. 11년의 유학을 마치고 산신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자, 산신은 자신도 죽음을 면할 수 없다며 ,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서 여우의 모습으로 주검을 나타냈다.'
결과적으로 산신이 죽으면서 삼기산의 주도권을 불교가 이어가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이후 불교는 산신의 도움을 받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산에 불교적 신성성을 부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산, 천관산, 낙산 등으로 이 산에 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를 흔히 '보살주처신앙 (보살이 자리 잡고 있다)'이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산에 산신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도력 높은 보살이 산에 상주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금강산에는 법기보살, 지제산에는 천관보살이 산다는 식이다. 고려시대에는 원나라에서 사신들이 오면 반드시 금강산에 가서 법기보살을 만나 의식을 행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산신의 신앙 공간인 산신각이 사찰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면서 산신은 보살과 혼재되면서 점차 산신이 부처님을 호위하는 양상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절은 모두 산의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고대 한국의 토착신앙인 산신숭배의 영향이기 때문이다. 선조들은 산신을 숭배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사당을 지었다. 불교 도입 초기에는 산신신앙과 불교의 대립과 갈등이 있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두 신앙은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 이제 산신의 거처는 점차 보살의 주요 거처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서 깊은 절을 보고자 한다면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 메고 산속 깊이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