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 큰 돌을 아래에 놓고 돌의 크기대로 작은 탑처럼 쌓은 돌무더기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 누구도 공들여 쌓은 탑들을 허물지 않는다. 오히려 돌 몇 개를 올리며 소원을 빈다. 이 글에서는 이렇게 돌을 쌓으며 소원을 비는 풍속의 유래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성황신앙의 유래
성황신앙의 유래는 두 가지로 추측한다. 첫째는 중국에서 온 것이다.
'성황'은 원래 방어시설에 대한 명칭이었다. '성'은 흙이나 돌을 쌓아 만든 것이고 '황'은 성의 주위를 움푹하게 파놓은 일종의 참호역할을 했다. 그런데 고대인들은 이 '성황'에도 신이 있어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다. 즉 '성황신'은 성의 수호신이었다. 여기에서 성황신앙이 비롯되었다.
성황신앙은 중국에서 시작되었는데, 6세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나라의 이백약이 쓴 <북제서>(636)의 기록을 보면 북제의 모용엄이 영성을 지키고 있을 때, 양나라의 침략을 받았다. 그런데 그 고을 성황신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면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또 중국 남북조 시대의 역사서 <남사>에는 양나라 왕실 후손인 소릉왕이 영주에서 왕위를 노리자 변괴가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소를 삶아 성황신에게 제사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러한 성황신앙은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를 거쳐 점차 보편화되었고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더욱 중시되었다.
이 성황신앙에 대한 우리나라의 기록은 <고려사> 권 91에 보인다. 고려 시대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귀양을 갔던 곳인 사주(현재 경남 사천)에 성황당이 있었다고 한다. 1055년(문종 9)에는 고려의 국경인 선덕진에 새롭게 성을 지었는데 이 성에 성황신사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고대 한국에도 마을과 성의 수호신이 있어 '성황신앙'과 내용은 같다. 하지만 '성황'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통일신라시대나 고려 초에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이라고 본다
둘째, 유라시아 북부에 널리 퍼져 있는 '오보'전래설이다.
'오보'라는 말은 투르크어 '오바'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오보'는 몽골의 샤먼 신앙이다. 대개 고개나 산꼭대기, 언덕 위, 혹은 사방이 탁 트인 곳에 돌을 탑처럼 쌓아 올리고 돌무더기 가운데 막대기를 세운 형태다. 막대기에는 다채로운 색의 천 조각들로 휘감았다. 이것은 북방민족 고유의 원시종교로 고대 한국으로 전해졌다는 설이다.
산신신앙
한국 민족은 고대부터 하늘을 숭배해 왔다. 하늘 숭배는 사실 농경민족에게 보편적인 현상이다. 농경에 필요한 기상의 변화가 모두 하늘의 조화에 따른 것이기에 하늘 숭배는 매우 자연스러웠다. 산악신앙 역시 이러한 하늘숭배의 연결선에 있다. 높고 험한 산은 하늘과 인간 세계를 매개시켜 주는 중간자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사고구조는 이미 고대 한국의 단군신화에 잘 나타나 있다. 하늘의 황제인 환인은 아들 환웅을 인간 세계로 내려보내 다스리게 한다.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자리를 잡고, 곰이 여자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나중에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즉 고대인들은 하느님이 이 세상에 강림했다고 믿었으며 강림한 하늘의 신이 곧 산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산악신앙은 산악 그 자체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산악을 인격화한 산신에 대한 숭배였다. 인간과 똑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기도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대에 산신의 성은 보통 여성으로 나타난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선도산의 신모는 원래 중국황실의 딸로 이름은 파소였다고 한다. 고려시대 운제산성의 산신도 남해왕의 왕비인 운제부인이었다. 신라, 고구려의 기록에도 산신은 여성이었다. 그러다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부터 남성의 신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마 전쟁수행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이 증대되고 중국 유교사상의 영향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680년(문무왕 20) 꿈에 나타난 석탈해의 청에 따라 그의 유골이 토함산의 산신으로 모셔졌다고 한다. 당나라 장수였던 설인귀가 감악산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후백제의 왕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고려 시조왕 왕건에게 투항했다. 훗날 박영규와 그의 후손 박란봉이 각각 전라도 순천의 해룡산신, 인제산신으로 모셔졌다고 전한다.
선황신앙과 산신신앙의 혼재
전통적인 산신신앙은 외래종교인 불교, 도교 등과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선황신앙과 혼재되어 나타났다. 성황신앙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신앙이었다. 신을 모시는 성황당이나 성황사도 성이라는 방어시설이 있는 곳에만 설립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한국은 산이 국토의 70%를 차지하는 까닭에 산성이 많고 발달하였다. 그러므로 성황당은 산에 위치하는 것이 많았다. 따라서 원래의 산신신앙과 혼동될 여지가 있었다.
게다가 산신이나 성황신은 모두 수호신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고대로부터 인간이 기원하던 것 중의 하나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비롯한 마을과 국가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산신을 통하여 달성하려 하였다. 이외에도 산신은 강우의 조절기능과 질병의 치유나 방지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 현종 당시, 목멱산사로 불리던 산신사가 1390년(공양왕 2)에는 목멱의 성황사로 지칭되는 예에서 두 신앙이 혼재됨을 볼 수 있다. 또 고려시대 때, 송악신사 또는 송악사당이라 불리던 것이 조선 태종대의 기록에는 송악 성황신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성황신앙'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신신앙과 혼재하는 모습을 보인다.
산신이나 성황신은 이렇듯 수호기능이 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해마다 이곳에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각 지역의 지방토호들은 이 신앙을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삼아 지역민들을 통제 장악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자신들의 선조를 산신이나 성황신으로 추봉하기도 하였다. 전라도 순천의 경우 그 지역의 세력가였던 박영규가 해룡산신으로 모셔진 예가 그것이다. 이 외에 의성의 김홍술, 양산의 김인후, 순천의 김총 등도 성황신으로 모셔진 예다. 따라서 때로는 산신, 성황신의 제사나 그 이용을 둘러싸고 국가와 지방 세력 사이의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수호신을 모시는 사당을 '성황당'이라고 한다. 명칭은 고장에 따라 서낭당, 선왕당, 천왕당, 서황, 국수당, 국시당이라고 부른다.
한국 국토는 70%가 산이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산을 오르는 경험이 많다. 지금도 고갯마루나 큰 나무 옆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혹은 작은 탑처럼 쌓은 돌무더기들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 과학으로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임에도 대부분 그 탑을 허무는 장난을 치지 않는다. 오히려 공손하게 돌을 올리며 소원을 빈다. 설령 그 유래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돌을 매우 신성시하는 행위로 보아 한국인의 무의식 중에는 산신과 성황신의 원시 신앙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산이 존재하는 한 한국인의 무의식 속의 토속 신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