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문화권에서 사랑을 받아 온 스토리텔링에는 일정한 문법이 있다. 그 문법에서 벗어나면 열정적인 환호를 받을 수 없다. 이야기의 주제는 다양하지만 대부분 환영받는 주제는 정의의 실현이다. 뉴스는 우리 공동체의 문제를 알리는 임무에 충실하기는 하지만, 부정 편향이 심하다. 분명 긍정적인 현상도 있지만 나쁜 드라마 문법만 고집한다. 결과적으로 세상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친다.
스토리텔링 문법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야기에는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스토리텔링 문법이 있다. 첫째, 투쟁 구조다. 자장가에서 흥미진진한 뒷담화까지, 옛 민담에서 경전까지, 저속한 리얼리티 쇼에서 고품격 다큐멘터리까지 대부분의 이야기가 선악 대결을 묘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인류학자 크리스토퍼 봄은 2000년대 초, 수렵채집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각자도생이 아니라 공생과 평등이라는 훨씬 따뜻한 윤리였음을 입증하여 명성을 얻었다. 인간은 집단을 이루어 살면서 개인의 이기적 충동과 집단의 요구가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했다. 악당은 이기적이고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한다. 주인공이나 영웅은 의분을 자극하고 동료들과 힘을 합쳐 맞서 싸워 마침내 친사회적인 가치를 확증해야 한다. 따라서 내가 속한 공동체의 결속을 훼방하는 존재를 내쫓는 구조는 항상 환영을 받는 것이다.
둘째, 언뜻 진부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이야기에는 깊은 도덕적 층위가 있다. 세련된 소설가나 역사가, 영화 제작자는 자신이 이야기의 도덕을 표현했을 리 없다고 하겠지만 그들은 단 한순간도 도덕적 설교를 멈춘 적이 없다. 그들은 따분한 보수주의적 도덕이 아니라 복잡하고 다층적인 도덕적 견해를 내세우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이 도덕에 반대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보수주의적 도덕주의에 반대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야기에 지극히 도덕주의적이고 심판자적인 성격이 있음은 이야기 story라는 낱말 자체에서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어 히스토리아 historia에서 왔으니 말이다. 역사 history 역시 여기에서 유래한다. 어원 히스토르 histor의 가장 오래된 의미는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어에서 쓰이던 용법으로 '심판, 현자, 판사'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단순히 중립적인 사건 서술이 아니라 거기에 판단을 가미한 것이다.
세 번째는 해피엔딩의 역설이다. 누구나 해피엔딩을 좋아한다라는 통념에는 역설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들은 이야기에서 행복을 좋아하지만 결말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데이터 과학자 데이비드 로빈슨은 픽션 플롯 11만 2000개의 요약본을 분석한 결과를 이렇게 요약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평균적 이야기를 요약하면 상황이 나빠지고 더 나빠지다 마지막 순간에 좋아진다' 이야기가 술술 풀려가기만 하고 갈등을 부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갈등과 투쟁의 긴 터널을 지나 해피엔딩은 짧게 한 줄로 언급될 뿐이다.
이야기 주제
이야기의 여러 주제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추상화된 정의다. 사람들은 도덕적 일탈과 정의 추구라는 도식적 이야기를 끝없이 갈망한다. 이야기가 쌓아 올렸다가 해소하는 조마조마한 정서적 긴장을 이끌어가는 가장 보편적인 원동력은 정의가 실현되길 바라는 우리의 염원이다. 과연 우리의 주인공이 악당을 이기고 정의를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미디어 심리학자 돌프 질먼은 수많은 실험에서 밝혔듯 사람들은 좋아하는 등장인물이 착하게 행동하여 성공하면 쾌감을 느끼지만 싫어하는 등장인물이 못되게 행동하여 성공하면 짜증과 불안을 느낀다. 이러한 도덕적 구조는 수용자에게 무척 깊은 정서적 만족을 선사한다. 특히 텔레비전 드라마는 정의의 정도가 강할수록 닐슨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기록한다. 가장 거창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신화도 이를 뒷받침한다.
고대부터 인류는 공동체의 전통에서 비롯된 도덕을 배운다. 도덕적 인간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사회적 의무를 지키려고 노력해 자기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공동체의 안정에 기여한다. 그런데 권력과 자원, 정치의 힘으로 이러한 구조가 뒤틀린다면 구성원들은 불편함을 떠나 분노하게 된다. 따라서 각 문화권의 모든 이야기는 정의 실현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공동체 속의 개인은 개인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체의 가치를 결정하며 이를 통해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누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외에 스토리나 메시지를 전달할 유대감을 쌓아야 한다면 사랑과 소속감, 안전과 안정, 자유와 자발성, 권력과 책임, 즐거움과 재미 중 1개 이상의 주제를 담아야 한다.
부정 편향의 영향
많은 이야기 장르 중 뉴스의 부정 편향은 세상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언론도 스토리텔링 길드이며 여느 장르와 마찬가지로 스토리텔링의 보편 문법을 따른다. 갈등, 혼란, 고통, 억압, 죽음의 서사가 평화와 조화의 서사에 비해 저자나 독자에게 큰 흡인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언론인은 해피엔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온통 부정편향이다. 만사가 아무리 나빠 보이더라도 결국은 착한 사람들이 승리하리라는 픽션의 해피엔드가 낙관론을 불러일으킨다면 뉴스 이야기는 염세주의, 편집증, 절망감, 정서적 무력감을 불러일으킨다.
캐나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방대한 자료를 동원하여 세상이 점점 좋아지고 있음을 알렸다. 개인 간 분쟁이나 전쟁은 부쩍 줄었고, 인종차별과 성차별도 대폭 감소했다. 인권은 신장되었고, 의료는 어느 때보다 개선되었다. 빈곤층조차 과거보다 훨씬 잘 살게 되었으며 식단도 훨씬 좋아졌다. 거의 모든 것이 나아지고 있으며, 나빠진 것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유토피아에서 산다거나 우리의 문제에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뉴스의 임무는 문제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고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뉴스가치의 일차적 기준은 진실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좋은 드라마인가다. 좋은 뉴스는 나쁜 드라마다. 뉴스는 합리적 행동을 취하도록 우리를 조정하지만, 심각하게 오조정하기도 한다. 뉴스 소비자들이 받아들이는 전반적인 메시지는 세상이 구제불능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뉴스는 아이들을 집에서 못 나오게 만들고, 도시를 떠나 교외로 이주하고 교외를 떠나 생존주의자 집단에 합류하라고 부추긴다. 그와 더불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강성 지도자를 선출하라고 꼬드긴다.
부정편향의 결과는 나쁠 수 있고, 도덕주의적 편향의 결과는 더 나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