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메멘토'는 순행성 기억상실에 걸린 레너드가 주인공이다. 10분이면 리셋되는 기억력을 가진 채, 사랑하는 부인을 죽인 범인을 찾는 스릴러물이다. 기억과 정체성은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현재의 나를 형성하기까지 과거의 수많은 경험들이 기억으로 저장되어 있기에 현재의 나를 알게 되고, 미래의 나를 가꿀 수 있다. 살아갈 의미가 되는 것이다. 레너드는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 '메멘토'
영화 '메멘토'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가진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데 실제 인물이었던 '헨리 몰레이슨'의 이야기에 영화적 허구를 더해 각색하였다. '헨리 몰레이슨'은 간질 치료 수술 후 순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렸는데 신경과학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총 25일이라는 상당히 짧은 기간에 촬영한 범인 추적 스릴러물이다.
주인공 레너드는 전직 보험 수사관이었다.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되던 날의 충격으로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그의 이름 '레너드 셀비'라는 것과 아내의 비참한 최후, 범인은 '존 G'라는 것이 전부다. 범인을 찾기 위해 메모, 폴라로이드 사진, 몸에 문신을 하면서 기억을 더듬는다. 그의 주변에는 그의 병을 이용해 이득을 보려는 사람들과 그를 조종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의지하거나 신뢰할 사람이 없다. 그는 형사로부터 믿기 힘든 진실을 듣게 되는데, 범인이 바로 레너드라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이 기억상실증인지 테스트하기 위해 10분 단위로 인슐린 주사를 놓아달라고 부탁했다. 진짜로 순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레너드가 아내에게 인슐린을 반복적으로 주사하다 결국 쇼크와 혼수상태에 빠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레너드는 사진에 형사를 믿지 말라고 써놓는다. 그는 이미 네 명을 살해했지만 자신의 새로운 살해대상을 직접 설정하고 늘 그렇듯 기억을 상실한다. 그는 항상 '존 g'에게 복수하기 위해 달려간다.
영화는 22개의 흑백 시퀀스와 22개의 컬러 시퀀스가 교차되는데 특이하게도 영화 전개는 시간순이 아닌 역순이다. 약 10분 단위로 천연색 영화 컷이 과거로 거슬러가도록 진행되고, 흑백 컷들은 순방향으로 진행되며 서로 중첩된다. 흑백 컷은 레너드의 과거 기억이다. 영화를 정리하자면 순서대로 나오는 흑백장면을 모두 이어 붙인 뒤, 컬러 장면을 영화 역순으로 이어 붙이면 시간 순서대로 영화가 진행된다.
놀런 감독이 구조를 이렇게 배치한 이유는 순행성 기억상실증을 가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계를 관객들이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관객은 흑백 장면과 컬러 장면을 짜 맞추면서 주인공의 투쟁과 왜곡, 과오, 물음, 정서 등을 경험한다. 관객들은 방금 본 것을 끊임없이 재평가하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관객은 스스로의 기억력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고, 영화의 혼란스러운 면을 바로잡기 위해서 어떤 인지적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강한 집중력과 기억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감독은 이러한 구조를 통해 기억, 정체성, 진실에 대한 탐구를 깊이 있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순행성 기억상실
순행성 기억상실은 건망증후군이라고도 불린다, 발생 원인은 장기간의 알코올 중독, 뇌 부위 외상, 노인성 치매 등으로 다양하다. 이 증후군을 앓으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시간과 날짜, 방금 먹은 음식조차 기억 못 하기도 한다. 1887년 러시아의 정신병리학자 세르게이 코르사코프가 알코올 중독이 뇌 손상을 일으키는 것을 관찰하다가 발견하였다. 그래서 코르사코프 증후군이라고도 불린다.
증상은 기억상실 이전의 기억은 보존되어 있으나 기억상실 이후 경험은 보존하지 못한다. 환자들은 자신의 기억에 생긴 공백을 허구의 이야기로 채우려는 작화증(Confabulation)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상황을 인지하는 통찰력이 결여되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증상이 심하면 역행성 기억상실증(Retrograde Amnesia)이 일어나 뇌가 손상되기 전의 상황들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기억과 정체성
영화의 결말은 레너드가 자신의 행동과 선택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되며, 관객에게도 예상치 못한 반전을 제공한다. 이는 '메멘토'가 단순한 복수극이 아닌, 기억과 인간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그의 간절함을 보면서 '기억'과 개인의 '정체성'은 같은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기억은 개인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감정과 연관된 사건들을 저장하고 다시 접근하는 과정이다.
한국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도 여주인공은 뇌종양 수술의 위험이 목숨이 아닌 기억상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남편이 '제발 살아만 달라'라고 부탁하지만, 과거 기억을 잃는다면 도대체 살아갈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어린 시절의 경험,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친구들과의 소통, 그리고 다양한 경험의 기억들이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짓는다. 내 정체성을 알아야 현재의 나를 인식하고 앞으로도 의미 있고 풍요로운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 미래를 살아갈 동력이 되는 이유다.
레너드는 10분마다 기억이 리셋되지만 그는 여러 도구를 사용해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범인을 찾아 복수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 기억이 그리고 그 목표가 그의 존재이유다. '메멘토'는 기억하라는 뜻이다. 기억을 통해 나의 정체성이 확립되기에 결국 내가 누구인지 나를 잊지 말라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