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대문밖에 사잣밥을 차렸다. 그리고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는 도구인 상여를 정성스럽게 꾸몄다. 이 글에서는 사람이 세상에 오는 순서는 있지만, 저승 가는 순서가 없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설화와 사잣밥, 상여에 대해 알아본다.
저승 가는 순서 없어진 이유
태어난 순서는 있지만 죽는 순서는 없다. 하지만 원래 인간은 태어난 순서대로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주도에 전해지는 설화는 그렇게 된 이유가 까마귀 때문이라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주 옛날 까마귀는 염라대왕의 저승사자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루는 까마귀가 저승으로 데려갈 사람의 명부를 물고 저승으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를 보니 마침 한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잖아도 배가 고프던 까마귀는 잠시 본연의 의무를 잊고 마을로 내려가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어지간히 배도 찼고 해서 다시 저승으로 바삐 날아갔다. 저승 문턱을 막 넘으려는데 입에 물고 있던 명부가 보이지 않았다. 그만 깜박 잊고 명부를 잔치집에 놓고 와 버린 것이다. 까마귀는 먼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명부에 적힌 사람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그래서 정작 잡혀갈 사람은 안 가고 엉뚱한 사람이 대신 저승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나는 순서는 있어도 죽는 순서는 없다'라고 한다. 까마귀의 실수로 그만 죽는 순서와 질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한국 속담에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건망증이 심하다'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사잣밥
한국은 전통적으로 사람이 혼(영혼)과 백(육체)으로 되어 있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몸은 땅에 묻히지만, 영혼은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온 저승사자에 이끌려 저승으로 가 심판을 받는다고 믿었다. 사자는 쇠몽둥이와 쇠사슬을 든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들이 쇠몽둥이로 등을 치고, 쇠사슬로 얽어매어 우악스럽게 사람의 혼을 데려간다고 여겼다.
저승사자가 두려웠기에 집안에 누군가 죽으면 제일 먼저 한 일이 대문 밖에 '사잣밥'을 차리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를 잘 대접해 망자를 편하게 모셔가 달라는 뜻이다. 사잣밥은 대개 밥 세 그릇과 동전 세 닢, 짚신 세 켤레 등을 놓는다. 밥, 동전, 짚신을 각각 세 개씩 올린 것은 저승사자가 세 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잣밥은 지역에 따라 차린 음식과 모양새가 조금씩 다르다. 경기도 고양 지역에서는 절구통을 거꾸로 엎어 놓고 그 위에 흰 종이나 도래방석을 깔고 키를 얹는다. 그리고 흰밥과 무나물 일곱 그릇을 놓는다. 그 옆에 짚신이나 망자가 신었던 고무신 등을 놓는다. 또 날된장이나 날간장 등 짠 음식을 올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저승사자가 짠 것을 먹어 갈증이 나면 물을 마시는 동안이나마 부모의 영혼을 쉬게 하려는 효자의 애절한 마음이 담겨 있다.
충청남도 논산지역에서는 입관이 끝나면 사잣밥을 엎어 놓아 입관이 끝났음을 알렸다. 이로써 사자상만 봐도 입관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상여
상여는 <주자가례>에 기록이 보인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장례의 발인절차에서 망자를 상여에 넣어 장지로 운구하였다. 상여는 상여꾼들이 시신을 장지까지 운구하는 도구다. 상여의 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나 더 길다. 몸채 좌우는 길게 뻗어 있어 양쪽 끝에 막대를 대어 사람이 어깨에 메었다. 몸채는 목조 구조물로 단청처럼 여러 채색을 하였고, 직물과 다양한 장식물을 사방에 둘렀다. 네 모퉁이에는 기둥을 세워 위로 포장을 쳐 햇빛을 가렸다. 상여 뚜껑에는 연꽃, 봉황 등으로 장식한다.
상여는 바퀴를 달아서 끄는 방식과 어깨에 메는 방식이 있는데 주로 어깨에 메는 형식이 일반적이었다. 그 이유는 장지가 주로 언덕과 산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지까지 거리가 멀거나 상여꾼을 구할 수 없다면 소를 메어 운구한 사례도 있다. 상여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서 장식물이 달랐다. 상여틀은 분해,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옛날에는 마을마다 상여 한 틀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상엿집을 짓고 그곳에 보관하였다.
구조와 장식물은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변화가 투영되어 단층에서 복층으로 높아졌고, 민화풍의 그림과 장식물이 화려해졌다. 특히 불로장생의 상징인 동방삭을 목각으로 조각하여 부착하였다. 동방삭은 삼천갑자(18만 년)를 살다가 신선이 된 인물이라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분이 상여에 타고 계시니 잡귀들은 길을 방해하지 말고 물러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1970년대 산업화와 공업화로 청년이 교육과 취업 등의 여러 이유로 도시로 이주하자, 마을 사람들은 상여 운구 인력부족 문제에 직면하였다. 그래서 꽃상여라고도 불리는 지상여를 썼는데, 철과 합성수지로 제작되어 비교적 가벼웠다. 현대는 대부분 병원의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운구차를 이용하고 있다.
결론
사람이 이 세상에 오는 순서는 있지만 죽는 순서는 정해져 있지 않다. 한국의 엣 조상들은 이러한 까닭을 저승사자 까마귀가 명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설화로 설명하였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사람은 혼과 백으로 구성되는데, 죽으면 쇠몽둥이와 쇠사슬을 지닌 무서운 저승사자가 혼을 저승으로 데려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성스럽게 사잣밥을 준비하여 망자를 편하게 데려가기를 기원하였다. 백은 육체를 의미하는데, 죽으면 시신을 상여에 넣고 장지로 운구하였다. 상여는 시대와 지역, 계급에 따라 다지인과 구조가 달랐지만 <주자가례>의 기본 구조와 형식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