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통 혼례는 신부집에서 올렸다. 그뿐 아니라 혼례 이후에도 신접살림을 신부집에서 시작하여 자녀까지 낳고 기른 후에야 신랑집으로 돌아갔다. 이 글에서는 왜 그런 풍속이 있었으며, 왕을 비롯한 조정에서는 이 풍속을 바꾸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알아보고자 한다.
전통혼례 신부집에서 올렸다
혼인을 하면 보통 여자가 남자 집으로 와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알고 있다. 오늘날에는 부부가 독립해서 따로 살지만, 부득이한 경우 남자 쪽 집으로 들어가서 산다. 여자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서 사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혼인한 후, 여자 집 뒤에 '서옥(사위집)'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 부부가 살도록 하였다. 사위는 돈과 폐물을 여자 집에 제공하고 자녀를 낳아 그 자녀가 장성하면 비로소 아내와 아이들을 본가로 데려갔다. 고려 시대에도 이러한 풍속은 처가에 머무는 기간만 조금 짧아졌을 뿐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남자는 혼인을 하면 처가에서 성장하기도 하고 거기서 자식을 낳아 키웠기 때문에 처가와의 관계가 돈독했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외가의 제사를 받드는 직계후손이 없는 경우, 외손이 대신 장례를 치르고 제사를 받들었다. 나라에서는 휴가를 30일씩 주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다른 관례는 중국 제도를 따랐으나 혼례에 관한 고유 풍속은 쉽게 바꾸지 못했다. 중국은 <주자가례>에 의거해 신랑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친영례'를 행했다. '친영례'란 신랑이 신부 집에 와서 신부를 데리고 본가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것을 말한다.
혼례를 신부집에서 올린 이유
전통혼례는 역사적으로 꽤 오랜 시간 신부 집에서 올렸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은 결혼을 하는 신부의 나이가 일반적으로 20세 이상의 성인이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과거에는 신부가 어렸다. 조선 시대 <경국대전>이 규정한 바로는 남자 15세, 여자 14세가 되어야 혼인이 가능하다고 정했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혼인 연령은 이보다 빨랐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 5, 6학년 정도의 나이에 혼인을 시켰다. 따라서 신랑 집으로 혼례를 치르기 위해 가마를 타고 수십 리가 되는 먼 길을 떠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아주 어려웠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치장한 매무새는 긴 시간 가마 안에서 흐트러질 것이고, 어린 신부는 녹초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딸 가진 부모는 선뜻 남자 집으로 혼례를 치르러 가는 것을 반대했다.
둘째, 신부 측에서 볼 때 신랑 집은 적진이나 다름없었다. 낯선 시아버지, 시어머니, 시누이는 새 며느리의 흠을 찾기 바쁠 것이다. 그나마 우군이라 할 만한 신랑 역시 아직 신뢰가 구축되기 전이다. 어린 딸을 이런 적진과 다름없는 남자 집으로 보내 혼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은 부모로서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자는 사정이 다르다. 여자 집에 가서 혼례를 치른다 할 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부담이 덜하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한국 속담에서 보이듯, 처가 식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사위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시중을 들 몸종을 데려가지 않아도 되었고, 당당하게 행동해도 누구 하나 군소리할 사람이 없었다. 신부집은 적진이 아니라 오히려 환대를 받는 환경이었다.
셋째, 여자 집의 경제적인 어려움이다. 남자 집으로 혼례를 치르러 갈 때, 신부 부모는 어린 딸을 보호해 줄 몸종을 딸려 보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의복, 기구와 그릇 등을 모두 여자 집에서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부담이 상당히 컸다. 신부 집에서 혼례를 치르게 되면, 신부의 혼수나 상속분을 혼례를 마친 후 서서히 준비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넷째, 남자 쪽에서도 역시 비용부담이 컸다. 혼례식 뿐 아니라 신접살림을 마련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신부집 못지않은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남자 집이 부자라면 곧바로 신부를 맞는 것이 어렵지 않겠지만, 가난한 사람은 부담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남자 집에서도 '친영례'를 기피했다.
그래서 신부 집에서 혼례를 올리고도 일정 시간 신부집에서 살았다. 자녀를 낳고 기른 후, 본가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혼례를 마치고 신랑 집으로 가는 시간이 짧아졌다. 혼례식 이후 하루 혹은 사흘 뒤에 출발하기도 했다.
왕을 비롯한 조정에서 반대한 이유
조정에서는 백성들에게 중국의 '친영례'를 따를 것을 여러 차례 권하였다. 그 이유는 본래 남자는 '양'을 의미하고 여자는 '음'을 의미했다. 음이 양을 따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요 섭리다. 그런데 한국의 풍속은 오히려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기 때문에 거꾸로 양이 음을 따르게 되어 음양이 뒤바뀌기 때문이다. 여자 집에서 혼례를 치르는 혼례풍속은 그 원칙을 깨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교적 신분사회에서 남존여비(남자를 여자보다 우대하고 존중)의 근본을 흔드는 문제이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중종 11년(1516)에 임금은 혼인의 예가 정해진 뒤에야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의 도가 바로 된다고 하였다. '친영례'를 거행하지 않고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거꾸로 하는 것이다고 하며 강하게 친영례를 주장하였다. 조선의 여러 왕들이 먼저 사대부부터 모범을 보이라고 주문했으나, 사실 사대부조차 전통혼례 풍습을 바꾸지 못했다. 수백 년 동안 남자가 여자집에 가서 혼례를 치르는 습속은 근래까지도 이어져오다가 1970년대 제3의 장소인 예식장이 생기면서 없어졌다.
결론
한국은 중국의 유교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음양오행설은 철학에 그치지 않고 일상의 모든 제도와 규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대부분의 의관문물은 중국 제도를 따랐으나 유독 혼례의 고유 풍속은 쉽게 바꾸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린 신부가 적진과도 같은 낯선 신랑집에 혼자 간다는 문제, 어린 딸이 먼 거리를 가야 하는 물리적 어려움, 그리고 어린 딸을 보호해줄 몸종과 갖가지 살림물품을 준비해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 신랑 집 역시 신혼부부의 집과 물품을 마련해야 하는 현실적 어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쉽게 중국 제도를 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신부는 태어나서 자란 집에서 혼례를 치르면 더 편안하고 안정된 마음으로 혼례에 임할 수 있다. 익숙한 환경의 정서적 안정은 신부의 임신과 육아에도 이점이 많았기 때문에, 신부집에서의 혼례와 일정 기간 육아를 했던 전통풍습은 과거 한국민의 삶의 지혜였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