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한 여인이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할 아들을 낳지 못하면 어떻게 했을까? 부인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양자를 들이거나 첩을 얻었다. 그럴 형편도 못되면 씨받이라는 편법도 동원되었다.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 경우 부인 역시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아들의 의미와 대를 잇는 여러 방법에 대해 알아본다.
전통사회 아들 의미
한국 전통사회에서 아들은 가족 구성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유교 사상과 가부장적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가치관 영향하에 여러 의미를 포함한다.
첫째, 가문을 잇는 계승자였다. 한국은 특히 조상 숭배 전통이 강했다. 아들은 제사를 주관하는 막중한 의무가 있다. 제사는 유교 사상에서 중요한 의례였고 이를 이어받는 것은 남자이며, 특히 첫째 아들의 책임이었다. 조상에 대한 예우를 유지하여 가문의 명예와 전통을 지속해야 하는 존재였다.
둘째, 경제적 주체였다. 아들이 경제적 책임을 지고 가정을 부양하는 중요한 역할이 주어졌다. 농경 사회에서 아들은 가업을 이어받아 농지를 관리하고,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아들이 가정의 경제적 안정과 지속성을 보장하는 존재였다.
셋째, 가부장적 권위의 상속이다. 아들은 가부장의 권위를 물려받는 사람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정 내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책임이 주어졌다. 이를 통해 가문의 전통과 규범이 유지되도록 하였다.
넷째, 가문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 상징이었다. 아들은 가문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 가문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아들이 많을수록 가정이나 가문의 부와 권위가 높았다.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사회적으로 불안정하거나 낮은 평가를 받았다.
결론적으로, 한국 전통사회에서 아들은 단순한 가족 구성원이 아니라 가문의 명맥을 이어가는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가정과 사회의 중요한 규범과 책임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양자와 첩
양자를 들이고 첩을 얻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대를 잇기 위해서였다. 혼인을 하고 정부인이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에게 별 문제가 없는데 자식을 못 낳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면 대를 잇기 위해 양자와 첩을 얻었다.
양자는 보통 가까운 친척, 예를 들어 형제나 사촌의 아들 중에서 선택되었다. 이는 동일 유전자를 가장 많이 공유한 사람으로서 혈통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양자를 선택했으면 지방 관리나 중앙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양자는 법적으로 친자식과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게 되어 제사와 상속에 대한 책임을 맡았다.
첩은 정부인 외에 남자와 계속적인 성적 결합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로 단순한 일시적인 간통의 대상이 아니다. 첩은 별가, 소실, 소가, 측실로 불렸으며 법적 지위가 인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산상속권도 인정되었다. 첩을 들이는 것은 주로 양반과 같은 상류층에서 이루어진 관행이었다. 가문을 유지하고 자손을 번성시키는 수단으로, 첩 제도를 허용했던 것이다. 첩의 출신이 중요하지는 않았으나, 양반 가문의 여성이 첩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과 조선말의 <형법대전>은 첩 제도를 공인하였다. 정부인은 2등, 첩은 4등의 지위를 인정하였으며(64조 7호), 일제강점기 초에도 첩은 공인되어 호적에 첩과 첩의 자식이 기재되었고, 재산상속권도 인정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첩은 사회적 평가와 지위가 낮았다. 그래서 첩의 자녀들은 관직에 나가는데 제한을 받았다. 1915년, 총독부 통첩(24호)으로 첩의 호적 혹은 입적이 금지되었다.
씨받이와 씨내리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와 첩을 들이기도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씨받이'나 '씨내리'라는 편법이 동원되기도 했다.
씨받이란 아들을 낳아 주는 조건으로 보수를 받는 일종의 직업여인이었다. 그 대상은 주로 신분이 낮거나 가난한 젊은 과부였다. 건강하고 민간에 알려진 아들 낳을 몸매를 지녀야 하는데 젖꼭지가 검고 단단하며 배꼽이 깊어야 하는 등 30여 가지의 판단기준에 맞아야 했다. 친척 중에 양자로 삼을 사람이 없거나 양반 체면에 첩을 두지 못하거나 경제 형편상 첩을 둘 형편이 못 될 때 이 방법을 썼다. 은밀하게 씨받이 흥정을 하고 나면 씨받이 여인의 월경일과 길일이 합쳐지는 날을 골라 합방을 했다. 이때 아이를 낳지 못한 정부인이 밖에서 대기하거나 무당이 경을 읽기도 하였다.
합궁을 한 뒤 씨받이 여인이 태기를 보이면 여인을 남자 집으로 데려와 출산할 때까지 바깥출입을 금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딸을 낳으면 곡식을 주어 생모가 기르게 하였고, 아들을 낳으면 논밭을 주었다. 당연히 평생 비밀을 유지하여야 했다.
"씨내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원인이 남편에게 있을 때, 외간 남자를 들이는 것이다. 특히 가문의 맏아들인 경우 양자를 들일 조건조차 마땅하지 않으면 남편의 묵인 아래 부인이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외간 남자와 성교하는 것이다. 대상으로는 후한 대가를 주어 떠돌이 장수를 데려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높은 가문의 귀부인인 경우 아이를 낳은 뒤 치욕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였다.
결론
한국 전통사회에서 아들은 매우 귀했다. 현대와 같이 가족 구성원이라는 의미 이상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가문의 명맥과 사회적 지위, 경제적 책임을 맡은 사람이었다. 만약 정부인이 자식을 못 낳거나 특히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법적으로 정당한 절차에 따라 양자를 들이거나 첩 제도를 활용하였다. 그럴만한 현실적 상황이 되지 못하면 씨받이나 씨내리의 편법을 쓰기도 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이런 습속은 외간 남자의 손길만 스쳐도 그 부위를 도려내거나 잘라야 했던 조선시대의 엄중한 도덕률과 상치되지만, 대를 잇는다는 명분이 더 중요했기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