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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성년식, 민간의 들돌들기, 주먹다듬이, 바구리

by 빛의 라 2024. 10. 3.

인간은 공동체에서 그 구성원으로 살아가는데 인생의 고비마다 새로운 환경에 들어가는 통과의례가 있었다. 특히 성년식은 개인적으로는 독립된 인격체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새 구성원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이 글에서는 한국 전통적 성인식과 민간의 성인식 의례인  들돌 들기, 주먹다듬이, 바구리에 대해 알아본다.

 

전통 성년식

 

성년식은 세계 모든 문화권에서 중요한 통과의례로 여겨진다. 특히 부족사회나 초기 국가사회에서의 성년식은 사회적 의미가 컸다. 어린아이가 성장하여 성년의 단계로 들어선다는 것은 비로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책무와 의무를 가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대 한국의 삼한시대 중 마한의 기록을 보면 소년들의 등에 상처를 내어 줄을 꿰고 통나무를 끌면서 그들이 훈련받을 집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 시대에는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관복을 입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시대 광종 16년(965년)에 태자에게 원복을 입혔다는 기록이 있다. 원복이란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원나라의 복장이지만, 당시 어른들의 평상복인 배자를 의미하므로 성인복을 입혔다는 뜻이다. 

 

조선초기의 성년식(관례)은 양반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고려 말에 명나라로부터 <주자가례>가 소개되어 사대부 계층에서는 이에 따라 관혼상제 의식을 지키기 시작했다. 관례는 관혼상제의 첫 번째 의식이다. 남자가 15세가 넘으면 길일을 택해서 일가친척과 하객을 초청하여 일정한 절차와 의식을 올렸다. 이때 땋아 내렸던 머리를 올려  상투, 복건, 초립, 탕건을 씌워 주었다. 그리고 성인의 복장인 도포를 입었다. 어렸을 때 불렸던 이름 대신 관명과 자를 지어 주었다. 성년식을 치러야 혼례 및 임관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된다.  여자아이는 긴 머리를 돌돌 말아 주먹모양의 쪽을 지고 비녀를 꽂아주었으며 그 위에 족두리를 얹고 용잠을 꽂아주었다.

 

관례를 치르는 연령은 보통 15세 이상이나 조선 중기 이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혼 풍습이 생겼다. 그때부터 10세 전후에 치르기도 했다. 때로는 어린아이들에게 관례의식을 치르지 않고 초립이나 복건을 씌우기도 하여 '초립동'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러한 전통 성년식은 조선말기 1895년(고종 32년)에 단발령이 실시된 이후 사라졌다. 그러다가 1977년 3월 30일 대통령령으로 '각종기념일등에 관한 규정'을 공포하여 이날을 정부 주관 기념일로 정하였다. 만으로 20세가 되면 과거 전통의 성년식을 계승하여 성년의 날로 지정한 것이다. 1985년 5월 셋째 월요일로 변경된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민간의 성년식

 

관례는 원래 양반계층을 중심으로 시행되었고, 민간에서는 양반과 다른 다양한 형태의 성년식이 실시되었다. 서민들은 성인으로 인정받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품삯이 달랐다.  2배의 품삯을 받게 되고 마을의 성인 남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사랑방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 농경을 주업으로 한 전통사회에서 어른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중요하게 여겼다. 성년의식은 지역마다 달랐다.

들돌 들기

 

전라도 지역에서는 들돌 들기를 했다. '들돌'은 쌀 한 섬 무게( 144kg)의 돌을 가슴까지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들돌은 보통 소, 중, 대로 나누는데 무게가 60,70kg부터 150kg이 넘는 것도 있다. 그중 제일 낮은 단계의 돌을 들어 올리면 성인의 자격을 얻는다. 중간 단계의 돌을 들면 '장사'라고 불렀고, 가장 무거운 돌을 들면 '머리나이'라고 하여 일반 성인 품삯의 2배를 받았다. 그리고  농악대의 기수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보통 18세에 이 의식이 치러지는데, 그 아이를 둔 집에서는 칠월 칠석날 온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음식과 술을 내어 잔치를 베풀었다. 총각이 장가를 보내달라고 보채면 허리 힘을 보기 위해 돌들을 들어 시험했다. 제주도에서는 들돌을 '똥돌'이라 불렀고, 충청도 지역에서는 '꽁배'라 하여 잔치를 벌일 때 '꽁배턱 치른다'라고 한다.

 

주먹 다듬이

 

광주산맥, 소백산맥 서쪽 지방에서는 '주먹 다듬이'라고 하여 신참례를 치른다. 우선 발바닥을 치고 다듬이 천을 씌워 때리거나 말로 희롱한 다음 신참례자에게 술상을 내렸다. 술상의 술을 마시면 성인으로 인정받았다.

 

'바구리'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새로 들어온 자에게 성적학대를 가했다. 이를 '바구리'라 하는데 동성애의 행위를 뜻한다. 마을 공동체의 선임자들과 동성 성교를 하는 것이다. 서북 지방에서는 울면서 웃는 묘한 감정을 나타내는 말로 '바구리에 떡 담아준다'라고 한다. 이는 신참례를 받으러 가는 어린 아들에게 참례 잔치용으로 떡을 싸줄 때의 어머니 심정을 비유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아들이 다 커서 성인이 된다는 즐거움 때문에 웃고, 어린 아들이 성인 남자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할 생각에 마음이 아파 운다는 의미다.

 

의미와 특징

 

반 게넵(A. Van Gennep)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이 처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혹은 어떤 사회적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통과하거나 전이하는 고비에서 행해지는 의례 체계를 '통과의례'라고 정의했다. 인간이 사회화, 문화화의 과정에서 지위와 역할을 획득하는데 따른 시련이 통과의례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성인이 되기 위한 '입사의례'다. 입사의례의 중심개념을 '죽음과 재생'으로 파악한 엘리아데(M. Eliade) 역시 인간은 태어날 때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통과의례를 거쳐 영적으로 거듭나야만 비로소 완전하고 성숙해진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통합의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가상적 죽음이 필요한데, 이때 자주 동원되던 것이 육체적 가학과 술이었다. 따라서 고대국가에서 행해지던 대표적인 성년식인 '할례'를 비롯하여 신체 일부를 절단, 절제하거나 상처를 내는 절차가 따랐던 것이다.

 

한국 전통 성년식 역시  '술 마시기' 의례가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성인식은 육체적 가학을 통한 상징적 죽음을 동원하지 않았다. 양반가에서 행한 한국의 전통 관례는 엄숙하고 절제된 유교적 의례로만 치르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민간에서는 양반의 관례와 달리 힘을 과시하여 성인 남자의 자격을 획득하거나 특정 공동체 성인과의 성교를 통해 공동체 합일에 이르는 과정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