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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웅의 유래, 목재 인형의 치병 기원, 현대 전승

by 빛의 라 2024. 8. 18.

TV 궁중 소재 드라마에서 왕비와 후궁과의 암투는 빠지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시청율을 올리는 데 이만한 소재가 없기 때문이다. 본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권력다툼의 도구로 '제웅(짚으로 만든 인형)'을 사용하여 상대를 저주한다. 하지만 '제웅'은 본래 저주의 역할을 했던 게 아니라, 액운을 물리치고 병치료를 염원하는 제물의 역할을 했다. '제웅'의 유래와 현대까지 전승되고 있는 '제웅치기'에 대해 알아본다.

 

제웅의 유래

 

'제웅'은 짚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이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제웅'이 신라 헌강왕 때의 인물인 '처용'의 이름을 빌린 것이라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제웅'의 본래 이름은 '추령'이었으나 이 '추령'은 '처용'에서 빌려 왔다고 설명한다. 짚을 재료로 만든 20~30cm 크기의 인형이다. 예로부터 매년 집안 식구들의 나이와 별의 관계를 계산했다. 나이에 따른 별운을 계산하여 액운( 좋지 않은 운)이 든 해를 맞은 사람이 있으면 액막이 방법으로 인형을 만들었다. 그런 해를  '나후(별 이름) 직성'이라고 부른다. '나후직성'에 드는 나이는 남자 10세, 여자 11세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9년을 주기로 반복된다. 음력 정월 14일 밤에 제웅(짚으로 만든 인형)을 만들어 액년을 당하는 사람의 옷을 입히고 이름 혹은 태어난 해의 간지를 적어 길바닥이나 다리 밑에 버리는데 이렇게 하면 그 액운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고 믿었다.

 

액운을 맡아 가져가는 사람을 대접한다는 뜻으로 인형의 머리, 가슴, 팔다리에 동전을 넣어서 버렸다. 이때가 되면 동전을 얻기 위해 여러 아이들이 문 밖으로 몰려와 인형을 받고 속을 헤쳐 동전만 꺼내고 나머지는 길에다 버렸다. 이것을 '제웅 치기'라고 한다. 조수삼의 <세시기>에 따르면 '제웅 치기'는 중국 송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19세기 초반에 조운종의 <세시기속>에 ' 나후직성 든 재앙 물리치려, 아이들이 문 앞에서 처용을 요구하네. 동전 몇 닢 넣어서 짚 인형을 내놓으면, 밤새도록 온 거리에 채찍소리 요란하네'라는 시를 적었다. 당시 액운을 쫓으려는 '제웅 치기' 풍습을 실감 나게 묘사하였다.

제웅은 조선시대 액운을 거두어내는 주술적 도구였다. 이 시대에는 별을 통해 운수를 살피고 액운을 물리치려 한 풍속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목재 인형의 치병 주술

 

경남 창녕의 화왕산성 안에 있는 연못에서 여러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그중 목간 4번은 사람 형상으로 조각을 한 다음 여성의 신체를 그리고 문자까지 기록하였다. 또 인체 그림의 머리, 목, 가슴 양쪽, 손 양쪽에는 6개의 못이 박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세월이 흘러 글자를 명확히 해석하기 어려우나 대략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00에 사는 00은 여섯 곳을 못으로 찔렀습니다. 29세로서 진족입니다. 용왕님께 제사를 올립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용이 전염병을 물리친다고 생각하였다. 신라인들이 역신(천연두의 신)을 물리친 처용을 동해 용의 아들로 설정한 이유다. 그래서 치유 기원을 위해 용이 있을 것이라 여겨졌던 연못 가에서 제사를 드렸다. 화왕산성 목간은 인물이 어떤 병을 앓고 누구인지 기록을 하여 용왕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뒷면의 인물상에 못을 찌르는 행위는 치병과 관계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풍습을 조사한 기록물에 따르면 귀신을 막거나 물리치고 병마를 퇴치하기 위해 인체와 환부를 침으로 찌르거나 피부에 상처를 내어 피가 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굴이나 뇌, 복부처럼 직접 상처를 내기가 위험한 경우는 종이나 땅 위에 그림을 그려서 인체를 대신하고, '제웅'과 같은 지푸라기 인형을 만들어 의제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양세시기>의 기록에는 여자의 경우 인형대신 종이에다 본인의 얼굴을 그려 돈을 넣고 싸서 길이나 개천에 버려 액을 막는다'라고 적혀 있다.

 

 

현대 전승

 

1970년대 전후만 해도 '제웅'을 통한 액막이가 전국 곳곳에서 전승되었다. 음력 1월 14일 저녁이면  성인 여성들이 길가에 제물을 차려 놓고 비는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떡시루 옆에 놓아둔 '제웅'을 불태우거나 길가에 던졌다. 그러면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이 제웅의 몸 안에 든 동전을 빼냈다.

지금도 새해 액막이 풍습은 전승되고 있고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에서는 '제웅'을 불태우는 대신 물에다 빠뜨린다.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만악리 초미동 마을에서는 음력 1월 14일에 거리에 제단을 쌓는다. 제물로는 잡곡밥이나 쌀 밥 세 그릇, 나물 세 가지를 준비한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제물을 사방에 던진다. 그 음식을 먹으면 운이 좋다고 하여 사람들이 집어 먹는다. '제웅'은 불태운다. 연기군 금남면 금천 1리 원금천마을에서는 무당을 불러 제사를 지낸다. 제물로 떡, 삼색 과일, 술 등을 준비한다. 시루떡은 3단이나 5단으로 쌓는데 짝수를 피한다. 날이 어두워지면 거리로 나가 짚을 십자가로 깔고 제물을 진설한다. 이때 동전도 올린다. 술 한 잔을 붓고 동서남북으로 돌면서 절을 한다. 이때 절은 세 번 이상 한다. '제웅'은 나후직성에 해당하는 사람의 속옷을 입혀 7번 매듭을 묶어 태운다. 제물은 사방에 던진다.

 

 

고대인들의 생활 속에서 살아왔던 각종 주술 행위가 지금까지도 진화하면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앙과 주술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인한가를 실감할 수 있다. 이러한 토속 신앙은 과거의 신앙일 뿐이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살아 있는 한국전통문화의 원형으로써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