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는 한국의 가면극으로, 1971년 1월에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이 글에서는 '처용'이라는 인물의 실체와 그가 어떻게 벽사(잡귀를 물리침)의 기능을 하게 되었는지, 나아가 유네스코로 등재된 처용무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것이다.
처용의 유래
처용의 유래는 <삼국유사> 권 2 '처용량 망해사'에서 시작된다. 내용은 신라 헌강왕 재위 5년(879년)에 개운포 바닷가로 놀이를 나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덮이면서 천지가 어두워졌다. 갑작스러운 변괴에 왕이 놀라 좌중에 물어보니, 일관이 말하되 "이것은 동해 용의 짓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용을 위하여 절을 짓도록 명하자 바로 어두운 구름이 걷혔다. 기분이 좋아진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와 춤을 추었으며 그중 하나가 왕을 따라오니 그가 처용이었다. 왕은 미녀를 짝지어 주고 '급간'의 벼슬을 내렸다. 처용은 달밤이면 거리에 나와 춤과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헌강왕 5년(879년)에 신라의 수도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서 춤과 노래를 불렀다. 그들의 생김새가 달라서 놀라웠고 옷차림이 괴이했다. 그때 사람들이 산과 바다의 정령이라고 일컬었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유사와 미묘하게 다르다.
처용의 실체
처용의 실체에 대해서 역사학계에서 지지하는 견해는 울산 지역 호족의 자제, 이슬람 상인, 비형랑 연관설 이렇게 세 가지이다. 이들은 각기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어 '처용'이란 캐릭터를 구성하고 있는 속성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첫째, 울산 호족의 자제설은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동해 용이 되었다고 하므로 이를 감안하면 문무왕의 제례를 받들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신라 호족의 아들이나 후손이라면 옷차림과 생김새가 괴이하다는 기록과는 맞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둘째, 이슬람 상인 특히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이다. 중세 이란의 서사시 '쿠시나메'에 따르면 사산 왕조가 아랍 세력에 의해 몰락하면서 왕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중 아비틴 왕자가 당나라(지금의 중국)를 거쳐 신라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서사시인만큼 사실이 아닌 내용도 많지만 이런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 신라와 이란의 교류가 있었고 관계가 가까웠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처용의 중동 출신성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무엇보다 남아 있는 기록에 처용 용모에 대한 묘사, 현존하는 처용탈의 이국적인 외모가 근거가 뒷받침된다.
셋째, 처용이 바리공주의 남편 어비대왕이라는 주장이다. 처용과 비량은 똑같이 고대 샤먼의 요소를 가진다는 연관성으로 본 견해다. 하지만 어비대왕과 비량은 신라인으로서 생김새와 옷차림이 기이하다는 기록과 맞지 않는다.
처용은 분명히 설화 속 인물이다. 이 설화가 특정한 목적성을 띤 것이라는 점에서, 처용을 역사 속의 실존인물로 환원하는 것은 위험하다. 설화가 현실과 무관할 수 없지만 그것이 현실의 직접적인 반영은 아니다.
벽사 (잡귀를 물리침) 기능
<삼국사기> 권 2 '처용량 망해사'의 내용을 이어서 보자. 어느 날, 처용은 밤늦게까지 놀다 돌아와 보니 침상에 발이 넷인 것을 보게 된다. 역신(천연두를 옮기는 귀신)이 아름다운 처용 아내의 모습에 반해 아내를 범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나 처용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난다. 처용의 인품에 감동받은 역신은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다시는 처용의 얼굴이 그려진 곳에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하며 물러난다. 이후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집 문 앞에 붙여 악한 기운이나 전염병을 내쫓고 좋은 기운을 불러들였다고 한다.
처용의 부인이 역신과 간음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신라에서 역병이 상하귀천을 나누지 않고 빈번했다는 의미다. 신라 경문왕대인 867~873년의 7년 사이에 세 번이나 역질이 일어났다. 당시 아라비아인과 서역 출신 상인들이 취급한 물품은 북아프리카, 아라비아 반도, 인도, 동남아시아에 걸친 광역의 교역망을 통해 입수한 향료와 약재가 주종이었다. 9세기 후반에 신라에 온 무슬림 상인들도 희귀한 약재와 의료품을 공급함으로써 역병 구제에 기여했고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역병을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도 했을 것이다. 처용의 벽사기능은 민간 풍습의 기원을 설명하는 일종의 전설이지만, 그 속에는 신라에 진출한 이슬람 상인들의 존재와 활동상이 숨어 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처용무
한국의 전통 무용 '처용무'는 1971년 1월에 대한민국의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신라의 향가였던 '처용가'는 고려시대에 일종의 극적 요소를 첨가한 무가(巫歌)로 발전되었다. 처용무도 초기의 단순한 주술무에서 다양한 절차를 갖춘 의식무로 발전해 나갔다. 고려 왕조 후기(918~1392년)까지 처용무는 무용수 1인이 공연하였으나, 조선 왕조 세종(재위 1418~1450) 때에 이르러 무용수 5명이 춤을 추게 되었다. 조선시대 <악학궤범>에 따르면 음력 섣달 그믐날, 묵은해의 역신과 사악한 귀신을 쫓기 위해 행하는 나례의식에서 두 차례에 거쳐 처용무를 추었다고 한다.
5명의 무용수는 각각 서쪽, 동쪽, 북쪽, 남쪽, 중앙의 다섯 방향을 상징하는 흰색, 파란색,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의 의상을 입었다. 처용무에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하여 악운을 쫓는 의미가 담겨 있어 장엄하고 활기찬 춤사위에서 씩씩하고 호방한 기운을 엿볼 수 있다.
무용수들이 쓰는 처용탈은 팥죽색 피부에 치아가 하얗고, 납구슬을 단 주석 귀고리가 달려 있다. 검은색 사모에는 모란 2송이를 복숭아 열매 7개를 꽂아 장식한다. 팥죽색과 복숭아 열매는 벽사(잡귀를 물리침)를, 하얀 모란은 진경(기뻐할만한 일로 나아감)을 상징한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등재된 '처용무'는 그 기원이 신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인들에게 재해와 질병은 엄청난 공포였다. 기술과 의술이 미미한 상태에서 생사가 갈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축적한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과 공동체의 생명력을 이어나가려고 노력하였다. 초자연적인 힘에 의지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풍요를 기원하는 것은 그 당시의 과학이었으며 원초적인 생존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