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주간 진행된 파리 올림픽(2024. 7.26~8.11)의 흥분과 즐거움의 가장 큰 요인은 물론 스포츠와 선수들 덕분이다. 많은 스포츠 종목 중, 이 글에서는 한국의 축구기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미 삼국시대에 축구가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편저편으로 이동하는 작은 공이 주는 짜릿한 흥분과 즐거움은 비단 현대인만의 오락이 아니었다.
축국의 기원과 유래
공을 발로 차는 놀이의 대표적인 용어가 '축국'이다. 우리나라 고대 문헌에는 '축국'외에도 축구, 농주, 금환, 격구등의 용어를 쓰기도 했다. 고대 한국의 축구는 중국에서 왔다. 축국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군주인 황제가 치우(중국의 요괴이자 전쟁의 신)와 싸워 이겨 그 머리를 찬 데서 비롯됐다는 설, 황제가 군대의 전술 대형으로 만들었다는 설, 전국시대에 군사의 선발수단이라는 설 등이 있다. 황제가 축국을 만들었다는 설보다는 군사훈련의 일환 내지 군사의 선발 수단이라는 설이 신뢰할 만하다. 중국의 사마천(B.C 145~ B.C 86)의 <사기>에 따르면 "제나라 사람들이 '답국(축국의 일종)'을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라고 기록했다.
그 후 <한서>에는 '축국 25편'이 실려 있으나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지만, 축국이 한나라 때( BC 202~221)에 체계화된 것이 분명하다. 한나라에서는 축국이 두 가지 형태로 발달하였다. 하나는 '국역'이라 불리는데 경기장의 양 끝에 구멍 6개를 파 놓고 공을 차 넣는 구멍차기 형태였다. 다른 하나는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래 차는 '제기차기' 형태였다. 전자가 군사훈련의 일환이라면, 후자는 왕실을 비롯한 귀족들의 놀이였다.
축국은 국제적 교류가 활발했던 당나라 때(618~907)에 더욱 발전하였다. 우선, 소나 돼지 방광에 바람을 넣고 가죽으로 감싼 공기공이 출현했다. 또한 땅에 구멍을 파는 대신 H자 형태의 막대기에 그물망을 얹은 공문을 세우고 공을 차 넣는 축국이 생겨났다. 서역에서 마침 Polo가 전해짐에 따라 경기방법을 축국에 적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Polo가 도입되면서 막대기로 공을 치는 격구가 성행하는가 하면, 축국이 새롭게 발전해 나갔다. 당나라 때부터 오늘날과 비슷한 그물망의 골대에 공을 넣는 축구 형태가 시작되었다.
발달 배경
축국이 중국에서 일찍부터 발달한 배경에는 군사훈련과 관련이 크다. 당시 군사훈련의 핵심은 진법 훈련을 익히게 하는 일이었다. 진법은 군사들의 집단적인 힘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전술로서, 무기를 들고 공격과 수비의 대형을 이룬 상태에서 나아가고 물러서며 앉고 서는 전술훈련을 말한다. 축국은 공격과 수비의 진법 대형을 유지하면서 공을 차는 훈련을 겸한 놀이였다. 근대식의 축구에서 4-2-4, 4-3-3과 같은 공격과 수비의 팀 편성(formation)은 그 옛날 진법 대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에서는 제기차기 형태의 축국이 크게 성행하였다. 군사훈련뿐 아니라 왕실이나 귀족들의 놀이로 축국이 발달한 것이다. 9세기말에는 과거 합격자인 진사들이 축국을 자주 할 정도로 문인들 사이에 꽤 인기가 있는 놀이였다.
중국에서 일찍이 축국이 발달한 사실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축국이 성행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삼국시대의 축구
우리나라에서 축국과 관련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삼국시대의 신라 기록이다. 신라의 김춘추가 왕이 되기 전에 친구 김유신과 축국을 한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의 신라 문무왕(661~681) 조에 따르면 "유신이 춘추공(후일 29대 태종 무열왕)과 축국을 하다가 춘추의 옷끈을 떨어뜨렸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최근 이 기록보다 100년 이상 앞선 시기의 축국 기록이 발견되었다. 신라 화랑들의 역사를 기록한 김대문의 < 화랑세기>가 바로 그것이다.
내용은 신라 23대 왕인 법흥왕(514~540)이 여동생의 아들인 영실공과 함께 궁 뜰에서 축구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축구를 공차기라고 표현했다. 왕과 조카가 궁궐 안에서 공놀이를 즐긴 것으로 보아 당나라 때에 크게 유행했던 제기차기 형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축국이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중국 문헌 <후한서>(25~219)의 '고구려전'에 따르면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에 능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볼 때, 고구려에서 축국은 적어도 1세기~3세기 이전부터 시행되었다. 당시 고구려인들이 축국을 잘한 배경에는 고대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축국으로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과 관련 있다.
당나라 문헌인 <북사>(219~616)에는 백제의 풍속을 전하면서 투호, 바둑, 악삭과 함께 '농주'를 소개하고 있다. '농주'는 손으로 공을 던지는 놀이와 발로 공을 차는 놀이를 아울러 지칭하는 용어였다. 손으로 공을 던지는 형태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곡예 장면과 통일 신라의 최치원(867~?)이 지은 한시 <향약잡영> 5수 가운데 '금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로 공을 차는 형태는 <삼국유사>에서 신라인들이 축국을 '농주'라고 한 데에서 확인된다. 이와 같이 백제는 축국을 농주라고 불렀다. <북사>의 기록으로 미루어, 백제에서는 적어도 3세기에서 7세기 초 사이에 축국이 크게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서 들어온 '축국'은 삼국시대 초반부터 크게 성행했다. 특히 중국 역사서에 고구려 사람들이 축국에 능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인의 축국 실력이 꽤 유명했던 모양이다. 당시 축국의 종류는 군사훈련의 일환으로 땅에 구멍을 파놓고 차거나 공문을 만들어 차 넣는 형태, 귀족들이 즐기던 제기차기 형태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왕실에서는 주로 제기차기의 형태였을 것이다. 제기차기 형태의 축국은 당시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7세기 이후 '게마리'라고 불리는 축국이 크게 유행하는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