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 전통사회는 태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단순히 어머니와 연결되어 영양분을 얻는다는 의미를 넘어 생명과 신성함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겼다. 이 글에서는 태를 자르는 도구부터 자르는 방법, 태를 처리하는 방법과 그 의미에 대해 알아본다.
태
탯줄 자르기
탯줄은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태아를 먹여 살리기 위한 영양 보급통로였다. 탯줄은 생명의 원천이자, 생명을 키워내는 집이다. 어머니 뱃속에서 아기가 나오면 제일 먼저 탯줄을 자른다. 이것은 아기가 엄마의 몸에서 떨어져 신체적으로 독립하는 첫 단계다. 그래서 탯줄을 자르는 일은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예부터 탯줄을 생산과 생명을 뜻하는 '삼줄'이라고 불렀고, 태를 자르는 행위를 ' 삼 가른다'라고 했다. 한국 민족은 그 어느 민족보다 태를 중히 여겨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탯줄을 자를 때는 탯줄을 잡고 아기 쪽으로 세 번 훑고, 산모 쪽으로 세 번 훑어 피를 한쪽으로 모은 다음 무명실로 묶고 배꼽에서 한 뼘쯤 되는 부분을 자른다. 그 끝부분은 실로 잡아매어 깨끗한 솜에 싸서 아기 배에 올려놓는다. 또 산모 쪽의 탯줄도 피를 한쪽으로 몰아 꼭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산모가 힘을 주어 태반이 나오게 해야 한다.
탯줄은 한 뼘 정도만 살아 있고 나머지 신경은 죽었기 때문에 아기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룬다. 너무 짧게 자르면 아이가 소변을 자주 보거나 배꼽으로 바람이 들어가 파상풍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탯줄 자르는 도구
요즘은 흔히 가위로 자르지만 한국의 조상들은 되도록 금속성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대나무로 만든 칼이나 수숫대 껍질 등으로 잘랐다. 경기도 지방에서는 수숫대 껍질로 자르는 경우가 많았다. 자손이 귀한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이로 자르기도 했는데, 이는 수명이 길어지라는 의미다. 조선시대, 빙허각 이 씨의 <규합총서>에 탯줄을 이로 끊어 묵은 솜에 풀솜을 입혀 둔다고 전하고 있다.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출세하라고 낫으로 탯줄을 자르기도 했고, 큰 인물이 되라고 도끼로 자르기도 했다. 특히 낫을 사용하면 수명이 길어진다고 전한다.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동생이 남자이기를 바라는 뜻에서 낫이나 식칼을 쓰기도 했다.
탯줄 처리
옛사람들은 탯줄을 잘 처리하면 아기에게 복이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불행이 온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태를 처리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민간에서는 일반적으로 탯줄을 태워 그 재를 작은 단지에 넣어 묻거나 물에 떠내려 보내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태울 때는 출산할 때 산실에 깔았던 볏짚에 태를 감싸 불에 태웠는데, 이는 짚에 있는 곡령의 힘을 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묻을 때에는 좋은 방향을 가려서 정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묻었다. 산짐승이 묻어 놓은 태를 먹으면 아이가 불행해지며, 특히 아이의 얼굴에 열꽃이 피어오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구례군 운조루 유 씨 가문에서는 맏아들의 경우 작은 단지에 탯줄을 넣어 사당 앞에 묻었다가 죽으면 관 속에 넣어주었다. 또 살아 있는 나무 아래에 탯줄을 묻어 아이도 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라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혹은 탯줄에 생명력과 신비함이 있다고 여겨 이를 말려 가루로 만들어 약으로 먹이기도 했다. 특히 경기하는 아이에게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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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방법
왕실에서는 탯줄 처리 과정을 왕릉의 조성과 종묘의 일처럼 의례로 정해서 거행했다. 조선시대 왕의 자손의 태는 태실이라는 특별한 장소에 묻혀 보관되었다. 탯줄을 태우지 않고 흰 항아리에 담아 명당에 묻었다. 이를 안태, 태묘, 장태, 태실이라고 한다. 태를 묻는 의례는 태를 생명의 시초로 여겨 이를 다루는 자세에 따라 그 사람의 화복이 결정된다고 믿었다. 소중하게 다룸으로 왕가의 혈통이 순조롭게 계승되기를 바란 것이다.
태와 인간 삶의 관계에 대해 당나라 현종 때 고승 일행이 <육안태법>에 기술한 것이 전해진다. 한 사람의 태가 언제, 어떤 땅에 묻히느냐에 따라 장래가 달라진다는 내용이다. 태를 묻을 시기도 정해져 있다. 남자아이의 탯줄은 생후 5개월이나 5년, 7년, 혹은 학문에 뜻을 둘 나이인 15세에 명당에 묻으면 학문을 좋아하고 병이 없으며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다고 했다. 반면 여자는 항아리에 태를 담아 두었다가 생후 3개월이나 3년, 또는 결혼할 나이인 15년이 되는 해에 날을 가려 묻으면 얼굴이 예뻐지며, 정숙하고 단정하여 남에게 흠양을 받는다고 믿었다. 시기도 중요하지만 묻을 땅을 선택하는 것도 중요했다. 따라서 왕실에서는 '태실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여 관리를 두어 전국에서 가장 좋은 땅을 물색하여 탯줄이 묻힐 지도를 작성하도록 하였다.
처음에는 묻을 땅으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3도로 한정하다가 조선시대 9대 왕 성종이 "일반 사람은 반드시 모두 자기 산에 태를 묻어야 한다. 풍수설은 믿을 것이 못 되므로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지방에서 고르라"라고 명을 내린 이후로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에 묻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왕실의 태실이 전해진다.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는 경상북도 성주군 월향면 인촌리 서진산에는 조선의 4대 왕 세종의 자제 19명의 태실이 있다. 경기도 원당동 서삼릉에는 조선왕조 태조 등 임금 21명의 태실과 후손들 33기가 안장되어 있다. 주위에 비석과 석물로 크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마무리
요즘은 부모가 자녀출산의 기념으로 신생아의 탯줄을 특별히 부탁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병원에서 버려진다. 한국의 옛 조상들은 보잘것없는 태에도 생명이 있다고 여겨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태를 소중히 보관하거나 깨끗한 항아리에 담아 묻는 등 태를 정성스럽게 다루는 행위는 아이의 건강과 운명을 보호하기 위한 전통적인 관습이었다. 생명과 운명에 대한 신성한 믿음, 가문의 지속성에 대한 염원, 그리고 태와 아이의 운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으로 과거 한국은 전통적으로 태를 소중히 다뤘다. 새로운 새명을 맞이하고 그 생명이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